회장인사말

존경하는 이론사회학회 회원님께,

2023년부터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 임운택입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시 한번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한국사회학회의 내로라하는 선배연구자들이 이 학회를 중심으로 사회학 이론의 확산과 자립화를 고민하면서 뜨거운 열정을 쏟아내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통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나 후학에게는 탄탈로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전통을 넘어서기는 쉽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통 안에 갇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론사회학회가 달려온 여정을 보면 확실히 과거와 현재에는 적지 않은 온도 차가 느껴집니다. 사회학 이론을 바라보고 지향하는 방식에서 당시의 상황과 현재 상황은 매우 달라졌습니다. 분과학문 자체가 드물었던 당시에 웬만한 사회학적 탐색은 이론사회학회 안에서 거의 다 소화되었을 법했지만, 현재는 많은 분과학회가 독립하여 이론사회학회의 본연의 정체성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위협은 단순히 학회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학회의 지향점과도 연결됩니다. 사회학 이론의 수입과 해석적 권위부여가 오랫동안 이론 사회학의 중요한 역할이었고, 간간이 수입이론의 아시아적 현지화 작업도 병행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의 향연에 취해서 나왔던 공동체이론이나 한국적 혹은 동양적 등등의 수식어를 붙인 이론화 작업이 있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분화된 세계로 이론과 현실을 구획하기에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물론 눈부신 경제적 성공에 드리워진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도 분명합니다. 이에 사회학의 여타 분과학문에서는 현대 한국사회를 포착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고, 성과도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은 지금까지 상당히 패치워크처럼 진행됐으므로 진단과 해석의 지점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이론사회학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전망이 우울하지도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세기말(fin de siècle)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사회학 이론의 강력한 자양분이었습니다. 긴 19세기의 후반이 마르크스, 뒤르케임, 베버, 그리고 미국에서 파슨스, 듀이, 미드 등의 이론과 사상을 만들어냈다면, 긴 20세기 후반의 사회학은 부르디외, 라투르, 기든스, 벡 등의 다양한 이론적 전망을 만들어냈습니다. 여전히 지속되는 혼란의 21세기에 이러한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론적 레거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면 정말 관념에 순사하는 형국일 것입니다. 혼란은 고통스럽지만, 이론적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양분이고, 실제 현재 해외에서 사회학은 여전히 중요한 이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제 이론의 수입과 해석도 중요하지만, 이론을 위한 이론, 소위 ‘트랜드’ 이론에 의한 현실의 짜맞추기식 진단은 과감히 떨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비(Harvey)의 표현처럼 세계화/지구화는 시공간의 압축을 가져왔고, 확실히 지방, 국가, 지역, 세계의 시공간의 간격은 백 년 전보다 훨씬 좁혀졌습니다. 한국사회의 변화는 흡사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빠르게 진행하여 이론가들의 논의가 한가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개인과 국민국가라는 전통적 사회분석 대상은 사회학의 고전이론과 달리 변화무쌍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오늘날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전형적 시민의 유형을 벗어나 다양한 정체성으로 분화하고 있습니다. 성, 인종, 민족, 종교 등을 중심으로 분화된 정체성은 이제 예외적 범주로서만 다루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회의 경계로서 국민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의 경계는 국가를 넘어 지역(아시아), 세계, 그리고 디지털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데, 기존의 이론적 분석체계만으로 이를 진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편과 특수의 위상이 바뀌고 있는데, 해석적 권위에 의존하여 이전의 낡은 렌즈를 재사용하는 방식의 이론적 접근은 이론가의 나태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임기 동안 학회 운영의 중요한 목표를 간략하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론사회학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21세기 현재의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기 위한 다양한 이슈와 쟁점을 점검하고, 이를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해외의 어떤 이론이 우선이 아닌, 한국사회의 문제진단에서 출발하는 이론화 시도를 학회활동의 중심에 놓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나 임기 2년 동안 일관성을 가지고 운영을 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 삼토회, 학술대회, 학술지 <사회와 이론>의 기획과 연계성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둘째, 학회 세부 활동의 연계를 위해 기획과 협업이 필수인 만큼 이전보다 운영위원의 역할을 좀 더 구체화하고자 합니다. 형식적인 이사직을 좀 더 단순화하여 학술기획연구에 적합하게 운영위를 재조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급격한 시도보다는 충분한 논의를 통해서 학회를 재구조화하려고 하고, 아마도 이를 위해 오랫동안 방치돼왔던 회칙과 규정을 2023년 한 해 동안 정비해서 연말에는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2024년부터 적용할 예정입니다. 셋째, 새로운 문제 인식과 관점을 공유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양한 관점을 지닌 외부 연구자의 지속적인 충원에 노력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기존에 이론사회학회에서 다소 미흡하게 다루어졌던 문화, 소수자 정체성, 사회운동, 정치 등의 분과학문 연구자들을 충원해 나가고자 합니다. 대략의 기획을 말씀드렸지만, 모든 게 회장 개인의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니고 연구자 동료로서 우리 학회 회원님들의 의지와 지지에 달린 일인 만큼 소통을 통해 변화를 이루어내도록 하겠습니다.

‘핀란드 역으로’라는 에드먼드 윌슨의 멋진 상상력에 빗대어 ‘이론사회학회 역으로’라는 희망찬 슬로건을 제안하며 인사말을 가늠하겠습니다.



2023년 1월 17일
임운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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